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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 권도경 기자
‘소아’가 붙는 진료과는 절멸위기다. 저출생에 소아환자는 줄었고, 병원은 돈이 되질 않으니 투자하지 않았다. 소아는 어른과 다른 독립적 존재다. 흔히 성인의 축소판이라고 여기지만 치료 방법 자체가 다르다. 어른에겐 생기지 않는 직장항문기형, 담도·식도·대장·소장 폐쇄 등 선천성 질환도 많다. 이 같은 선천성 기형을 수술하는 소아외과 의사는 전국에 31명 있다. 아이 몸에 흉터가 거의 남지 않는 복강경 수술을 집도할 수 있는 소아외과 의사는 케이비캐피탈 10명이 채 안 된다. 서울을 벗어나면 소아외과 의사는 더 귀하다. 한국에선 “소아외과 의사를 하면 ‘바보’ 된다”란 말을 듣는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지역을 지키는 의사도 있다. 지난 4월 8일 대구 달서구 신당동 계명대 동산병원에서 만난 정은영 소아외과 교수는 비수도권에서 소아외과 로봇수술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의사다. 복강경 소아외과 시행기관 수술 집도의로는 영남권에서 유일하다. 정 교수가 없다면 대구·경북에선 부모가 아픈 아이를 안고 원정진료에 나서야 한다. 얼마 전 그는 담도폐쇄증을 앓는 소아를 세계 최초로 ‘단일공(Single Port) 로봇수술’로 집도했다. 정 교수는 “지역에도 소아외과 의사는 부족했고, 지금은 저를 필요로 하는 대구가 제가 있어야 할 곳”이라며 “고향에서 의사로서 제 제일은행 주택담보대출 역할을 잘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어릴 때 정 교수의 꿈은 ‘묻지마 외과의사’였다. 초등학생 때 임파선염을 앓았는데 배농술로 금세 낫게 해 준 의사의 수료증이 눈에 들어왔다. 외과 전문의였다. 그때 어느 의대를 가더라도 외과의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서울 ‘빅5’ 병원에서 전공의(인턴·레지던트) 수련을 마친 후 일반외과 전문의를 땄다. 뱅크몰 세부전공으로는 대장항문외과를 택할 작정이었다.
운명은 필연으로 다가왔다. 정 교수는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 국제협력의사로 군복무를 대신했다. 전문의를 딴 후 국제협력의사로 뽑히면 가난한 나라에서 3년간 치료할 수 있어서다. 의대생 시절부터 원했던 일이다. 정 교수는 2005년부터 탄자니아 북부 므완자(Mwanza)에 있던 부간도(Buga 공사보금자리론 ndo)종합병원에서 일했다. 권역에 딱 한 곳 있는 종합병원이었다. 환자에겐 마지막 보루였다. 현장은 비참했다. 현지 의사들은 민영보험이 없는 환자들을 외면했다. 병동엔 치료받지 못한 이들로 넘쳐났다. 방치됐던 아이들이 숨지면 비로소 빈자리가 나왔다.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정 교수가 공보험만 있는 환아들을 도맡아 수술했다. 그제야 병동은 회전됐다. 현지 의사들은 다른 과가 진료를 의뢰해도 기피했다. 파견 나온 독일 소아과 의사가 정 교수에게 환아 치료를 의뢰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국에서 하던 대로 바로바로 수술과 처치를 했다. 독일 의사가 의뢰한 환아들은 정 교수 몫이 됐다. 그는 “회진을 돌 때마다 애절한 눈빛으로 쳐다보거나 매달리는 엄마들을 지켜보는 게 너무 힘들었다”면서 “희한하게 일반외과 전문의인데도 소아외과 환자를 많이 보게 됐다”고 말했다.
3년간 집도한 소아외과 수술은 800여 건이다. 사실상 소아외과 수련을 한 셈이다. 의사로서도 크게 성장했다. 교과서에서만 볼 수 있던 선천성 기형을 많이 접한 것이다. 선천성 기형은 아이를 많이 낳을수록 발생 빈도 역시 늘어난다. 탄자니아 여성들은 평생 자녀를 5∼6명씩 낳는다. 선천성 복벽결손(장이 배 밖으로 돌출), 선천성 거대결장증 등 닥치는 대로 수술했다. 정 교수는 “처음 하는 수술이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논문을 찾아보거나 한국에 계신 스승님들께 여쭙는 등 공부하면서 수술했다”고 말했다.
이때 경험은 큰 동기부여가 됐다. 당시 수술은 최선책이었다. 하지만 완벽한 수술은 아니었다. 아이들에겐 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소아외과를 제대로 배우고 싶어졌다. 귀국 후 소아외과를 세부 전공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자교인 계명대 동산병원은 소아외과에 유독 강했다. 고향에서 소아외과 의사로 살자고 결심했다.



2011년 소아외과 전문의가 된 후 새로운 술기(術技)에 도전했다. 아이들 삶의 질을 위해 복강경과 로봇수술을 배웠다. 성인과 달리 소아는 수술하면 흉터를 평생 지니고 살아야 한다. 이는 마음의 흉터로도 남게 된다. 소아외과 복강경 수술은 배우기 쉽지 않았다. 아이들 몸에 3㎜짜리 구멍을 내는 복강경 수술은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애먹기 십상이다. 말리는 선배가 더 많았다. 절개하면 쉬운데 사서 고생한다는 핀잔도 늘었다. 정 교수는 국내 소아외과 복강경 수술 선구자인 서정민 삼성서울병원 교수와 김대연 서울아산병원 교수를 찾아갔다. 2∼3년 동안 서울을 오가면서 이들 교수 수술을 모두 참관했다.
복강경 수술을 처음 집도한 날 수술대 앞에선 무섭고 두려웠다. 막막한 순간을 연신 넘어서니 실력은 늘었다. 서전(외과의사)에겐 경험이 ‘깡패’다. 손과 몸은 오롯이 기억했다. 복강경 수술보다 더 정밀하다는 장점을 지닌 로봇수술까지 배웠다. 정 교수는 “환자에게 더 좋은 치료와 더 많은 선택지를 줄 수 있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며 “제가 수술을 못하면 그만큼 환아의 선택지가 줄어든다는 점이 어려운 술기를 배우는 힘듦을 감내하게 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제가 못해서 선택지를 줄 수 없거나, 환자를 다른 병원에 보내는 일이 없도록 제 분야에선 확실한 의사가 되고 싶었다”고도 했다.
소아외과 술기에선 한 획을 그었다. 소아외과 의사가 드문 만큼 정 교수에겐 서울 대형병원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가 자주 온다. 개원가나 수도권으로 갈 생각은 없다. 그에게 의사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해 택한 직업은 아니었다. 환자에게는 ‘믿을 수 있는 의사’로 남고 싶다고 했다.
“의사는 정말 복된 직업이에요. 다른 사람을 의미있게 도울 수 있는 직업은 많지 않아요. 그런 만큼 책임감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직업은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라 나 자신을 완성시켜주고 내가 좀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는 수단이에요. 자부심을 갖고 가치 있는 일을 하는데 돈을 못 번다고 무시하는 사회적 잣대가 안타까워요. 제가 없으면 안 되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소아외과만큼 의사로서 역량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분야도 없어요. 우리 미래세대를 기르는 데 도움 줄 수 있다는 점도 뿌듯해요. 직업적 만족감과 자긍심도 높아요. 아이들 삶의 질을 높이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니깐요.”
권도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