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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국상망재 댓글 0건 조회 21회 작성일 25-06-08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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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풍성한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안네 프랑크〉편의 경우 개인과 역사(제2차 세계대전)를 함께 다룰 수밖에 없어 기사가 약간 더 길어졌습니다.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사 중 파란색 글자는 안네의 실제 일기장 속 문장을 따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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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스러운 소녀




안네 프랑크의 네덜란드 학생 시절, 1940 [Collectie Anne Frank Stichting Amsterdam]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안 생태1등급 네 프랑크는 학교 내 유명한 인기 소녀였다.
그녀는 외모부터 시선을 끌었다. 진갈색 머리칼은 볕뉘처럼 반짝였다. 옅은 갈색인 두 눈은 멀리서도 깜빡이는 게 보일 만큼 맑았다. 행동에도 귀염성이 있었다. 일단 잘 웃었다. 그럴 땐 앞니가 훤히 보였고, 뺨에선 볼우물도 패었다. 마음씨도 따뜻했다. 우는 아이와 길 잃은 동물은 절대 지나치지 못 급식비소득공제 했다. 나이에 어울리게 수다를 즐기는가 하면, 나이보다는 성숙하게 고전을 쌓아두고 읽는 모습도 보였다.
안네는 유급을 겨우 면한 수학을 빼고는 성적도 좋았다.
특히 언어 시험은 늘 만점이었다. 글을 얼마나 잘 썼는지, 교사가 직접 “반 아이들이 다 듣도록 나와서 읽어보라”고 할 정도였다.
그뿐인가. 안네 가지급 는 집안마저 좋았다! 이 덕에 차림새도 단정했다. 평소에는 몸에 맞는 흰 무명옷, 여름이 되면 짧은 원피스를 입었다. 호주머니 안에는 과자와 용돈이 넘실거렸다.



사진사를 보고 웃음 짓는 안네 프랑크, 1941, 네덜란드 시절


무직자대출상담이러니 많은 남학생이 안네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훗날 안네가 한 회상에 따르면, 사내아이들은 안네의 자전거 앞에서 그녀가 오길 하세월 기다렸다. 안네가 모르는 척 안장에 오르면 이들도 그제야 자기네들 자전거에 올라탔다. 나란히 타고 가다 서로 이야기를 할 때가 있는데, 그 순간에는 “십중팔구 나에게 반해 열심히 나만 쳐다보곤 했다.” 여자 친구가 있는 녀석에게 “널 안 순간부터 그 애는 공상일 뿐이었어”라는 고백을 받은 적도 있었다.
안네는 이에 “우쭐해지기는 했지만 그뿐, (내가)마음을 움직이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았다.” 다만 안네는 외려 그런 도도한 모습 덕에 더 “여왕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진작부터 청춘물 주인공으로 낙점된 듯한 안네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까.
또래와 웃고, 종종 남자 친구가 바뀌고, 가족과 교사 모두에게 사랑받는 숙녀로 크지 않을까. 글 잘 쓰는 적성에 맞춰 기자 또는 작가가 돼 이면을 들추는 일을 하지는 않을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럴 수 없었다.
이 글에서 마냥 천진한 내용이 나오는 건 딱 여기까지일 뿐이다. 이제부터는 꿈과 기대, 희망에 대한 청사진 따위를 음미하기는 어렵다. 앞으로는 무슨 이야기가 쓰이는가. 힌트는 나치, 전쟁, 수용소. 그리고 일기장이다.

마음에 쏙 든 ‘일기장’




안네 프랑크의 일기장, 1942


1942년, 6월 14일 오전.
안네는 잠에서 깼다. 시계를 봤다. 짧은 바늘은 이제 막 6시를 지나가고 있었다. 다시 눈을 감았지만, 심장이 계속해 뛰었다. 이유가 있었다. 오늘은 평생 딱 하루밖에 없는 그녀의 열세 번째 생일이었다.
어떤 선물이 있을까. 호기심에 굴복한 안네는 거실로 쪼르르 향했다. 오. 벌써 보따리가 쌓여있었다. 하나를 풀었다. 먼저 나온 건 일기장이었다. 흰색에 가까운 베이지색과 빨간색 체크무늬가 있는, 도톰한 감촉의 공책이었다. 이어 꽃다발과 화분, 파티용 도구와 초콜릿, 책 ≪네덜란드의 신화와 전설≫ 등 소품도 잔뜩 있었다.
타고난 글쟁이인 안네는 쌓인 선물 중에서도 일기장을 최고의 수확으로 쳤다.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걸 순도 100%의 솔직한 글로 옮길 수 있는 곳. 감수성이 예민해지기 시작한 십 대 소녀 입장에선 새집이자 창고, 비밀 친구가 생긴 기분이었다.
안네는 일기장에다 곧장 ‘키티’라는 이름과 인격을 준다.

키티에게.


안네는 빈 곳을 펼쳐 연필을 놀렸다.

그녀는 일기장에 “나는 다감한 부모님과 언니, 족히 서른 명은 되는 친구가 있는 소녀”라고 썼다. 남학생도 많이 온 생일 파티를 열었고, 녀석 중 상당수는 본인을 엿보는 데 여념이 없었다고 너스레도 떨었다.
이런 와중에 “우린(안네와 일기장 ‘키티’) 친한 친구가 될 거야”란 글과 함께 결심한 듯 속내도 보였다. 이쯤부터 글의 분위기가 뒤집힌다. 그녀가 갑자기 “나는 쓰고 싶고, 가슴속에 숨어있는 모든 걸 다 털어내고 싶어. (…) 내게는 참된 친구가 없고 (…) 세상에서 고독을 느끼고 (…) 다른 사람을 믿는 마음이 없어서”라는, 뜻밖의 처연한 문장을 쓰기에.
이건 대체 무슨 고백인가. 그저 사춘기 청소년이라면 흔히들 겪는 질풍노도를 토로한 걸까. 그뿐만은 아니었다. 사실 안네의 고백에는 그녀가 품어온 여러 ‘역사’가 서려 있었다.

히틀러의 독일, 광기를 삼키다




안네 프랑크의 여권 사진, 1939, 폴리포토


안네와 그녀 가족이 지금 있는 곳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하지만 이들이 원래 살던 곳은 따로 있었다. 이곳과는 수백㎞ 떨어진 곳, 독일 프랑크푸르트였다. 그러니까, 이들 모두는 먼 거리를 딛고 이사를 온 상태였다. 더 정확히는 망명(亡命) 내지 피신을 한 상황이었다.
왜? 그 시절 독일을 손아귀에 쥔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azi·나치) 때문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1933년, 안네가 고작 네 살이던 시절. 반(反)유대주의적 음모론에 찌든 과격파 히틀러가 기어코 독일 정권을 잡았다.
히틀러는 전쟁 준비에 착수했다. 이런 가운데 유대인과 집시, 정치범에 대한 차별과 학살에도 힘 쏟았다. “유대인과 그 잔당은 사악하고 열등한 존재”라는 일그러진 믿음, 타 국가 침공에 앞서 국민(정확히는 나치 지지층) 결속력을 높이려는 계산에 따른 행보였다.



연설하는 히틀러 [Brazilian National Archives]


안네의 가족은 독일계 유대인이었다.
독일에 남아있으면 못 볼 꼴을 볼 게 뻔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집안 내 여유가 있어 곧장 대응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바로 피난 길에 오른 것이었다. 도착한 곳은 당시 중립을 내건 나라, 네덜란드였다.
안네는 그렇게 광기에 찬 독일을 등지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까지 왔다.
사업가였던 아버지 오토는 거기서도 수완을 발휘했다. 이곳에서 식품 회사를 이끌었다. 성과도 썩 괜찮았다. 이 덕에 안네 또한 망명 와중에도 여유로운 일상을 보낼 수 있는 것이었다. 시간은 착실히 흘렀다. 1934년께부터 어느덧 8년가량 세월이 스쳐갔다. 그러다 어느덧 안네 또한 타국에서 열세 번째 생일을 맞은 것이었다.
안네도 알고 있었다. 자신은‘운이 좋은’ 유대인이어서 피난처에서도 이런 생활을 누릴 수 있다는걸.



아돌프 히틀러와 베니토 무솔리니 [Eva Braun]


이런 가운데 나치 독일도 덩치를 불리고 있었다.
나치 독일은 1939년 폴란드를 침공했다. 기어코 제2차 세계대전 포문을 열었다. 나치는 피에 취해있었다. 모든 걸 집어삼켜 살을 뒤룩뒤룩 찌우기에 바빴다.
그런 괴물에게는 중립을 표방하는 나라를 배려할 마음 따위도 없었다. 네덜란드로도 마수를 뻗은 나치 독일은 이곳에조차 위험한 사상을 흩뿌렸다. “유대인은 우리의 불행이다.” 시작은 혐오 구호, 그다음은 차별 정책, 이를 넘어서는 학대, 결국은… ‘청소’.
안네는 겹겹이 쌓이는 악의 흐름을 직시(直視)하고 있었다. 전차 이용 금지, 극장 입장 금지, 밤 8시 이후로는 외출 자체를 금지…. 언젠가부터는 네덜란드 안에서도 유대인 핍박 제도가 자리를 잡았다. 안네가 겉으로는 본인을‘미스 수다쟁이’라고 칭할 만큼 해맑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는 불안과 외로움의 씨앗을 품고 있는 이유였다. 어디에도 토로하기 힘든 그 마음을 일기장에서나 솔직히 고백할 수밖에 없던 까닭이었다. “찌는 듯한 더위야. 몸이 녹을 듯해. 그래도 (전차를 탈 수 없기에)땀을 뒤집어쓴 채 걸어야 해.” 그녀는 일기장에 대고 이런 신세 한탄도 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안네는 여전히 연애 이야기를, 성적과 진로 이야기도 함께 썼다.
“오, 제발 아득한 훗날에나 닥쳐오기를” 바란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일상이 송두리째 무너지다




안네 프랑크, 1935 [Photo Collection Anne Frank House]



키티. 지난 일요일의 일은 옛날처럼 느껴져. 그사이 세상이 뒤집힌 것 같은 사건이 있었어. 그렇지만 키티. 난 지금 살아있어. 그게 중요한 거야.


1942년 7월 8일, 수요일. 앞선 일요일에 “내 기말시험 결과가 생각보다 좋았어”라는 일상 글을 쓴 안네는, 고작 사흘 만에 이처럼 급박한 투의 문장을 휘갈겼다. 그때 안네와 가족은 은신처로 숨어 들어가 있었다. “속옷 둘에 팬티 셋, 스커트, 재킷, 여름 코트, 양말 둘, 긴 구두, 털모자, 스카프를 한 채 숨이 막힐 듯한” 차림새로 온 그곳은 아버지가 일하는 건물의 책장 뒤 숨은 공간이었다. 면적은 약 100m²(30.25평). 이는 어른들의 조치였다. 안네의 언니 마르고에게 “노동 수용소로 오라”는 통보가 내려오자 여기에 응하지 않기 위해 행한 결정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언니와 안네.
그리고 또 다른 유대인 가족 판 펠스(안네식 표현은 ‘판 단’) 가족 셋, 유대인 치과 의사인 프리츠 페퍼(안네식 표현은 ‘알베르트 뒤셀’). 이렇게 여덟 명이 이동식 책장 건너 공간에서 비밀 생활을 시작한다. 나치가 몰락하길 손꼽아 기다리며. 그날이 그렇게 늦게 올 줄은 알고 있었을까.

은신처에서의 ‘집요한’ 삶


키티. (…) 종일 울고 있어야 옳을까? 아니. 나는 절대로 그럴 수 없어.


안네는 이때부터 자신의 ‘특수한’ 일상을 더 집요하게 썼다.

슬픔에 잠식되지 않고, 절망에 뜯어먹히지 않은 채 계속해 기록에 나섰다. 그리고 그것은, 2차 대전의 광풍에 휘말린 당시 모든 유대인의 애환을 비추는 사료(史料)로 훗날 인정받는다.
가령 안네는 24시간 갇혀 사는 생활 속 기침조차 제대로 할 수 없던 환경에 대해 썼다(“언니가 독감에 걸렸어. 밤중에 기침 소리를 내지 않도록 감기약을 듬뿍 먹였어.”). 총과 대포 소리, 비행기가 지나가고 조종사가 낙하하는 상황을 기록하고 두려움을 표했다(“밤새도록 총소리가 도시 전체를 흔들었어. 나는 아직도 총소리나 폭격기에 대한 공포를 떨칠 수 없어.”).
감시가 심해지면 시든 콩과 썩은 감자, 말라버린 양배추만 먹어야 했던 좌절감도 기술했다(“양배추 냄새는 이루 말할 수 없어. 썩은 건포도와 달걀을 합쳐놓은 듯해.”). 그런가 하면, 연합국(영국·프랑스·소련 등) 또는 추축국(독일·이탈리아·일본 등)의 행보에 따라 마음이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모습도 내보였다(이 얼빠진 전쟁놀이가 빨리 끝났으면!).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 1936


안네는 전쟁 상황을 쓰고 묘사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았다.
안네는 전쟁과 더불어 ‘인간’을 쓴다. 전쟁의 참상 속 조금씩, 그러나 착실히 으스러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존엄을 솔직하게 글로 옮긴다.
안네의 일기장 속 은신처 사람들은 계속해 다툰다. 정말 지겹도록 싸운다.
초기에는 나름 예의를 지키려고 하던 어른들부터 수시로 티격태격했다. 안네 또한 하루는 어머니, 또 어느 날은 판 단 부인, 얼마 후에는 치과의사 뒤셀과 갈등을 빚었다. 급박한 전쟁, 이에 따른 은신 생활로 신경이 곤두서지만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큰 문제가 아니었을 이유로.
예컨대 안네와 판 단 부인은 야채 편식 건으로(“아주머니는 으레 이렇게 말하곤 해. ‘넌 우리 같은 집안에서 가정 교육을 받아야 해. (…) 네가 만약 내 딸이었다면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을 거야.’”),안네와 뒤셀은 작은 탁자 하나를 놓고 소리를 빽 지르며 갈등을 빚었다. (“‘탁자는 꼭 내가 쓸 거야. 나중에라도 비켜줄 생각은 없어!’ (…) 화가 난 나는 (…) 속이 부글부글 끓었어. 이건 너무 무례하잖아.”)
누군가의 생일이 되면 작은 선물을 주고받는 식의 훈훈한 모습도 보였다. 다만 이 분위기 또한 오래가지 않았다. “질문 하나, 말 한마디, 대답 한마디마다 곧 트러블이 생겨.” 안네는 포기한 듯 이처럼 담담한 글을 쓰기도 했다. 마냥 숭고하게, 밑도 끝도 없이 비장하게 쓰지 않았기에 더 서글픈, 보다 실감 나는 증언이자 당시 풍경들이었다.



안네 프랑크의 마지막 사진, 1942, 여권 사진 촬영 현장에서 찍힌 것으로 추정 [Photo Collection Anne Frank House]


안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어나는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도 심혈을 기울인다.
이로써 안네의 일기는 1차원적 사료와 증언의 단계를 넘어, 시와 같은 예술성도 함께 품는다. 둘 중 한 분야도 오롯이 이뤄내기 힘든 일을 인류가, 그것도 십 대 소녀가 해내고 만 것이다.
또 한 번 총소리가 울리던 밤.
겁에 질린 안네는 아버지에게 촛불을 켜달라고 졸랐다. 아버지는 발각 위험으로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어머니가 벌떡 일어서 초에 불을 붙였다. “안네는전쟁이 익숙한 군인이 아니다”라는 말과 함께였다.“아버지는 결국 입을 다문 채 불꽃만 쳐다봤다.” 그녀의 기록이었다.
그런가 하면, 일기장에는 안네가 어머니의 밤 인사와 기도 제의를 뿌리치고 “쫓아내”버리는 장면도 나온다(안네와 어머니는 가치관을 놓고 여러 번 충돌했다). “엄마는 ‘안네, 나는 화내고 속 썩이고 싶지 않아. 억지로 사랑할 수는 없으니까.’라고 말하셨어. 그러곤 눈물을 글썽이셨어. (…) 냉정하게 구는 나를 안타까워하는 엄마 모습은 처음 봤어.” 이러한 사연들은 읽는 것 자체로 속이 미어진다.



안네의 언니, 마르고 프랑크, 1939


안네는 은신처에서 남자 친구도 사귀었다. 상대는 판 단 부부의 아들이자 또래였던 친구, 페터.
안네는 원래 페터를 “약해 보인다”고 무시했다. 하지만 그 소년은 안네에게 “너는 명랑한 성격으로 늘 나를 도와주고 있어”라고 하고, “네가 웃으면 좋아. 그러면 뺨에 보조개가 생겨. 어떻게 만드는 거야?”라며 말을 걸었다. 마음이 녹는 표현들이었다.
빗장을 푼 안네는 끝내 “너는 나의 엘도라도(이상향)”라고 불러주는 그 아이를 좋아하고, 끌어안고, 생애 첫 입맞춤도 했다. 페터와 가까워진 후, 안네의 일기장에는 옅게나마 설렘의 향이 깃들기 시작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 안네는 이를 몸소 증명하고, 그 경험을 글로 생생하게 옮긴 것이었다.

안네에게는 꿈이 있었다




안네 프랑크의 여권 사진, 1939 [Photo Collection Anne Frank House]



키티. (…) 오랫동안 상추만 먹고 있어. 모래 섞인 상추, 섞이지 않은 상추, 스튜를 만들거나 끓인 상추. 그다음은 시금치, 양배추, 오이, 토마토, 소금에 절인 배추 등등.


안네는 끈질기게 썼다. 보고 들은 전쟁 경과, 일희일비하는 은신처 사람들의 모습과 함께 이런저런 잡설까지도 꾹 눌러 담았다.

사실 안네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1944년 3월29일. 책장 뒤 몰래 산 생활을 2년 가까이 한 어느 날, 귓가에 닿은 라디오 방송으로 더욱 구체화할 수 있었다. “(당국은)전쟁이 끝나면 전쟁 중 쓴 일기와 편지를 챙겨야 한다고(챙길 것이라고) 했어. 모두가 내 일기를 수집하려고 달려들 거야.” 안네는 그녀의 두툼한 일기를 기반으로 ≪은신처≫라는 책 출판을 꿈꿨다. 기자, 아울러 작가가 되는 상상도 더 진지하게 했다.
안네에게는 하나의 믿음과 하나의 소망이 있었다. 전자는 “종이는 인간보다 더 잘 참고 견딘다.” 후자는 “죽어서도 영원히 살고 싶다.”

신에게 간절한 기도를 올리다 끝내는 맨바닥에 쪼그려 앉아 무릎을 감싸안고 흐느껴 울어. (…) 마음속으로 용기를 부르며 이렇게 부르짖어. ‘나는 꼭, 나는 꼭, 나는 꼭….’ 이 말밖에는 더는 나오지 않아.


안네는 일기장에 이런 글도 썼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안네의 꿈은, 그녀의 일기는 갑작스럽게 끊기고 만다. 1944년 8월 1일을 끝으로.

이 무렵 나치는 ‘믿을 만한 정보원’의 제보를 받았다.
그 결과, 안네와 가족을 8월 4일에 붙잡을 수 있었다. 이들이 숨어서 산 기간은 761일이었다. 최근까지도 여러 추측이 오갔지만, 밀고자의 정확한 정체는 알려지지 않았다. 나치는 은신처의 비밀스러운 구조를 진작부터 속속 알고 있었다. 이는 즉 ‘범인’은 안네와 가까운 사람, 안네의 일기장에 한 번이라도 언급된 인물일 가능성도 상당하다는 뜻이 된다.
그 무렵, 2차 대전은 앞서 6월 연합국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성공을 전후로 드디어 흐름이 바뀌고 있었다. 추축국, 특히나 독일을 향해 먹구름이 짙게 깔리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괴물은 피를 쏟아내는 중에도 여전히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죽기 전, 유대인을 하나라도 더 잡아먹기 위해.

꺾이고 만 찬란한 꽃 한 송이




아우슈비츠(II)에 있는 여성들, 1944


붙잡힌 이들이 기차 가축 칸에서 사흘을 견딘 끝에 도착한 곳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세 모녀는 낮에는 돌을 나르고, 밤에는 다른 이들과 포개진 채 잠들었다. 가족은 가장이자 아버지인 오토를 찾았지만, 그는 이미 남자 수용소로 격리된 상황이었다.
어머니는 배급받은 빵을 먹지 않았다. 딸들에게 주기 위해 의무실 벽 틈에 몰래 숨겼다. 안네의 경우 한 번은 물과 채소를 빼돌려 함께 먹을 수프를 끓이려고 했다. 이는 언니가 말리는 바람에 실제로 하지는 못했다. 언니와 안네, 그리고 은신처 식구였던 판 단 부인(이 무렵 판 단 씨는 이미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은 그나마 ‘건강한’ 여성으로 뽑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이동한 시설은 베르겐-벨젠 수용소. 아우슈비츠만큼이나 열악한 장소였다.
이들을 떠나보낸 후 홀로 남겨진 어머니가 먼저 숨졌다. 딸들을 잃은 그녀는 곧장 곡기를 끊었고, 이에 아사(餓死)했다고 한다. (이들이 떠나가기 직전 큰딸을 상대로 ‘어떻게’ 해보려던 경비병에게 맞서다 맞아 죽었다는 설도 있다). 안네에게 첫 입맞춤을 준 페터 또한 어느새 사라진 모습이었다.
붙잡혀간 언니와 안네, 판 단 부인은 침대와 변소가 같이 있는 비좁은 방에서 생활했다. 1만명을 잡아들이기 위해 지어진 이곳에는 당시 4만1000명 이상이 잡혀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인간이 인간으로 살 수 있는 환경일 리 없었다. 하루, 또 하루…. 사람들은 ‘파리처럼’ 죽어갔다.



베르겐-벨센 수용소 해방 당시 모습, 1945 [No 5 Army Film & Photographic Unit]


당시 상황을 본 이들의 회상에 따르면 안네의 언니가 먼저 죽었다.
장티푸스를 앓고 쇠약해진 그녀는 침대(2~4층 침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에서 떨어진 후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급격하게 침울해진 안네 또한 얼마 안 돼 사망했다. 당시 나이는 고작 열여섯 살. 사인은 발진티푸스였다. 자매가 죽은 시기는 1945년 2~3월 사이로 예상된다. 수용소로 잡혀 온 후 근 6개월 만에 숨지고 만 것이다.
불과 몇 주 후인 4월 15일. 영국군이 베르겐-벨젤 수용소를 해방한다. 그러니까 딱 몇 주만 더 버텼다면 생사의 갈림길 앞 다른 길을 택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매와 함께 온 판 단 부인은 그사이 또 다른 수용소에 간 것으로 보인다. 이후 확인할 수 없는 이유로 사망했다는 게 정설이다.
은신처 식구 중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이는 아버지 오토뿐이었다.
광풍이 사그라든 후, 오토는 한때 은신의 삶을 도왔던 네덜란드 여성 미프 히스에게 뜻밖 물건을 건네받았다. 그게 안네의 일기장이었다. 그것은 급박했던 체포 당일, 은신처에 마구 흩뿌려져 있었다고 한다.
1947년. 독일의 패망으로 2차 대전이 끝나고 2년이 흐른 때. 안네의 아버지는 이를 출간한다.
일상을 씹어먹은 전쟁의 참혹함을 누구보다 솔직하게, 아울러 어떤 문인보다도 문학적으로 써내려간 이 기록물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오를 만큼 가치를 인정받는다.



안네 프랑크, 1935 [Photo Collection Anne Frank House]



나는 꼭, 나는 꼭, 나는 꼭….


이는 안네가 “이 말밖에 더는 나오지 않았기에” 울면서 계속 되풀이했던 말이다. 나는 꼭 기자로, 작가로, 푸르른 나날의 소녀로 “죽어서도 영원히 살고 싶었을” 그녀. 그녀는 죽었지만 그녀의 꿈은 되살아났다. 아주 늦었으나, 결과적으로는 모두 다 이룰 수 있었다. 이 사실이 하늘에 있을 그녀에게 그나마, 아주 작게나마 위안으로 닿을 수 있기를.


참고자료

안네의 일기, 안네 프랑크, 문예 출판사
Anne Frank, The Diary of a Young Girl, Frank, Anne, Penguin Classic
Anne Frank, The Diary of a Young Girl, Anne Frank, Om Books Internatio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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